엘 찰텐에 도착한 지 이틀 째 되는 날. 오늘부터는 날씨가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관광안내소의 이야기에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. 파타고니아의 최고봉인 피츠로이와 세로 토레를 보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. 전 날 라구나 토레 트래킹이 여파로 과연 피츠로이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 Laguna de los Tres까지 갈 수 있을지는, 가면서 판단하기로 했다. 이미 아침 해가 떴기 때문에 '불타는 고구마'를 보는 걸 포기한 상태였고, 그래서인지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도 어렵지 않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.
'불타는 고구마'는 일출 시에 빨갛게 물드는 피츠로이의 모습을 보고 여행자들이 지어준 별명이다.
피츠로이로 올라가는 길 도중에 있는 Mirador del Torre (토레 전망대)와 Laguna Capri 카프리 호수까지는 꽤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. 어제 Lagua Torre 라구나 토레로 가는 길보다 훨씬 부드럽고 걸을만했고, 게다가 멀리 피츠로이가 보이는 풍경 또한 트래킹 하면서 꽤 볼만한 풍경이었다.
항상 바쁘게 여행을 다니는 게 습관이 되어있던 나도 조금은 지친 건지, 파타고니아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피츠로이 트래킹은 좀 여유롭게 다니고 싶었나 보다. 앞서 열심히 걷고 있는 남편에게 피츠로이 등반은 포기하자고 이야기했다. 오늘은 왠지 힘들게 트래킹 하기보다는 예쁜 풍경들을 눈에 담고 싶다고.
등반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Laguna Capri 라구나 카프리, 카프리 호수에 도착했다. 호수 근처에 캠핑장이 있어서 트래킹족들이 이 곳 저곳에 텐트를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. 바람이 불지 않아 호수에 물결이 치지 않을 때에는 마치 거울처럼 호수에 피츠로이가 비친다고 하는데, 오늘 같은 날은 바람이 조금 불어 그 모습을 담는 것은 실패했다. 하지만 물결이 쳐도 피츠로이는 예쁘고 또 예뻤다.
카프리 호수를 지나 토레 전망대(Mirador del Torre)로 가는 중에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!
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한데 모여서 딱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. 아마도 관광안내소에서 그림으로 봤던 그 딱따구리인 것 같다. 이 딱따구리의 이름은 Magellanic woodpecker.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에서 흔히 발견되는 매우 큰 딱따구리라고 한다. 수컷은 아래 왼쪽 사진처럼 머리 부분이 붉은색을 띠고 있고, 암컷은 오른쪽 사진 같은 모습을 띠는데, 우리는 두 성별의 딱따구리 모두를 볼 수 있었다. 초심자의 행운인가보다.
30분을 넘게 딱따구리만 쫓아다니면서 걷다 보니, 토레 전망대에 도착하였다. 우리는 자리를 잡고 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. 다른 남남 커플의 사진도 찍어주고, 우리 셀카도 찍고. 왜 피츠로이는 보고 또 봐도 멋지고 매력적인 건지.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츠로이 등반을 위해서 먼 아르헨티나까지 오는지 알 것 같았다.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았을 테지만 오늘 이렇게 여유롭게 트래킹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듯싶다.
여유롭게 피츠로이를 느끼고 내려오는 길. 민들레처럼 생긴 노란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고, 우리는 그 옆에 산에 오르면서 주웠던 나무 막대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왔다. 우리처럼 트래킹이 힘들 것 같은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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